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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종, 군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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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변된 역사 == 작중에서 등장하는 조선의 긍정적인 변화 양상은 '''[[노론 음모론]]의 [[안티테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서인-노론 세력의 개혁안(군신공치, 서얼허통, 노비제도 혁파 등)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북벌]]'''(을미정난). 물론 소설 속 [[을미정난]]의 실상은 많이 쳐줘도 무력 시위이고, 실제로는 역도를 규탄하기 위해 황실에 직접 지부상소를 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러한 변화 양상은 진정한 의미로 서인-노론의 개혁이 성공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원 역사 [[세도정치]]의 주요 세도가들이 대부분 노론 출신이었으며, 구 세도가들이 살아남아 오히려 고종의 개혁 정책을 도운 대가로 재벌가로 전환되거나 재벌이 아니더라도 나름의 살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원 역사에서도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 다시 구 세도가들이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도와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본작에서는 원 역사와 비교해도 특히 두드러진다. 작중에서 자세한 묘사는 안 나오지만 소론이나 남인 가문들도 각자 서원, 학원을 차리거나 법관이 되어 그럭저럭 살림이 폈다는 암시가 있고 조선사 붕당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 '''계해환국''' 귀남이 군밤장사를 하면서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철종(조선)|철종]]이 승하하기 전에 귀남을 입궐시켜 자신과 [[철인왕후]]의 양자 '완정군'으로 입적시켜 세자로 책봉했다. 그 결과 안동 김문이 원 역사보다 일찍, 더 처절하게 권세를 잃었다. 그러나 세도가 축출임에도 피가 흐르지 않았고 단순히 정계에서 쓸어내는 것으로 끝났다. 이로 인해 귀남이 철종의 양자로 즉위하였으며, 귀남의 4대조가 [[사도세자|장종]], [[정조(조선)|정조]], [[순조]], 철종으로 바뀌었다.[* 원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으로 칭제건원을 하면서 장조, 정조, 순조, [[효명세자|문조]]가 고종의 4대조로서 황제로 추존되었고, 귀남 또한 칭제건원을 했다면 본문의 4대조가 황제로 추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 역사와 달리 칭제건원과 귀남의 4대조 황제 추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도 사도세자는 황제 대신 왕으로서 장종으로 추숭되었다.] * '''[[예릉]]''' 귀남이 철종의 유지를 받들어 고인에 대한 호의로 강하게 밀어붙여 철종이 [[서삼릉]]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가 아니라 철종의 어릴 적 고향인 [[강화도]]가 보이는 [[김포시]] 문수산에 묻혔고 이에 따라 왕릉을 수호하기 위해 문수산 일대의 성보와 해안 각 진의 화포들이 정비되었다. 덕분에 [[을축양요]] 때 조선의 방어력이 더 높았던 데다 하필 프랑스와 싸운 곳이 예릉이 있는 문수산성이었기에 이곳이 함락되면 선왕이 능욕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조선군은 전멸을 각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한성근의 원군이 도착해 선왕릉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비극은 피했다. 이후 프랑스측은 멋대로 명분 없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서는 타국의 왕릉을 공격한 꼴이 되어 엄청난 도의적 감점을 당해 조선에 큰 약점을 잡혀 평등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게 목줄이 잡히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 '''[[서원]] 확충''' 서원이 철폐되지 않았다. 전생에 제대로 못 배운 것에 한이 맺힌 귀남이 서원의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서원이 결국 학교고 학교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생각으로 일축하였다. 실제로 현대의 [[사립학교]]도 재단의 비리 등 각종 문제가 많았던 것을 보면 틀린 판단으로 보기도 힘들다.] [[문맹|억울하게 무식쟁이 소리 듣는 사람]]이 줄어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역으로 지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祭需)를 늘려주는 대신 면세 혜택을 회수하여 서원이 국가의 돈을 받아먹고 대신 민중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다소 온건한 방식으로 폐단을 없애면서 서원 확충을 추진했다. 그 결과 폭발적인 기세로 증가한 서원이 자연스럽게 근대의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그리고 서원 철폐를 통한 세수 확충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수가 늘자 나라의 곳간이 줄어들며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익문사]] 조기 설치''' 원 역사보다 무려 38년이나 먼저 익문사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익문사]](益'''聞社''')가 아니라 익문사(益'''文司''')다.[* 작가 曰: '''"작가의 말장난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억지력일까요?"'''] 서원 확충이 결정된 직후 대원군이 새로 지어진 서원에 제때 경전을 내려줘야 한다는 핑계로 [[보부상]] 무리를 결집해서 만든 일종의 [[정치깡패]] 느낌의 사조직인데 대원군은 수족으로 쓰려고 만든것이지만 핑계로 삼은 경전 배부라는 명분에 개화파가 올라타 개화사상 듬뿍 넣은 서원 보급용 교과서(?) '격몽신편'이 배포되어 서원이 늘어난 향촌에 구석구석 보급되면서 세간의 여론이 개화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상 제국익문사처럼 비공식 정보기관이다. 한편으로 고을 안에서 이간질을 하며 각종 대립을 일으켜 정부정책에 집단 반발하지 못하게 여론을 갈라놓고 다니던 전적이 있다. 이후 급격한 개혁정책에도 [[만인소]] 등 큰 규모의 집단반발 없이 조용했던 것은 이 덕분. * '''을축변법''' 귀남과 박규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짜낸 신법. 오래전부터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박규수가 귀남이 미래 지식을 토대로 내놓은 '이러이러하면 좋겠다' 수준의 엉성한 방안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였다. 내용을 보면 우선 '''사람의 목을 쌓아올려야 설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해 없어지는 것이 옳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는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는 조건으로 [[가톨릭]] 및 [[불교]], [[동학]](천도교) 등 기타 신앙을 전면적으로 허용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이로 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오가작통의 법에서 따와 그 교인 중 누군가 위법한 일을 저지르거나, 알고도 이를 고변하지 않으면 그 고을의 모든 교인들을 함께 벌하기로 했다. 두 번째는 개항이다. 자유 구역으로 지정한 제물포 한 곳에서 [[관세]]를 납부하면 이양선과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했다. 이는 원 역사의 제물포 개항보다 11년이나 빠른 것으로, 이후 병인년에 경흥, 원산, 동래가 추가로 개항지가 됐다. 또한 양물(洋物)에 관세를 부과하고 이양선 단속의 법제를 마련함으로써 [[덤핑]]과 같은 방식으로 나라의 부가 함부로 새어나가는 폐단을 막을 수 있게 시정했다. 끝으로 동원[[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민보군을 조직했다. 화경공 [[이항로]]를 비롯한 일부 보수적인 선비들은 어찌 사학을 허통하고 양이와 통교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귀남이 직접 이항로를 불러 군밤으로 비유한 일종의 [[흑묘백묘론]]을 논설하여 설득하며 감복시키고, 개화당이 익문사를 통해 널리 설파한 변이개화론을 신봉하는 진보파 선비들과 밀무역으로 피해가 막심한 개성상인들의 지원사격 덕분에 [[왕안석]]의 신법처럼 좌초되지 않았고 그대로 시행돼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 '''[[을축양요]]''' 1865년 [[프랑스 제2제국]]의 함대가 강화도의 조선군과 무력충돌을 일으킨 사건. 원 역사의 [[병인양요]]다. * '''조불수호조규''' 을축양요에서 문수산성 전투가 조선군의 승리로 끝난 직후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니 애초에 아무런 트집잡을 명분도 없이 남의 나라에 무턱대고 쳐들어가서 그 난리를 피웠는데 전투에서 죽까지 쑨 이번 원정을 마뜩잖게 생각했던 로즈 제독이 지금이라도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압력을 넣었고 벨로네는 안 그래도 약점을 제대로 잡힌 터라 조선이 베르뇌 주교의 죽음을 포함해 모든 일을 덮어주는 조건으로 타 열강이 조선을 압박하면 프랑스가 중재해준다는 내용으로 [[최혜국 대우]]나 영사재판권, 해안측량권, 조차권 등 각종 이권을 모두 챙기지 못한 평등조약으로 체결되었고, 이 조규로 인해 다른 열강들도 '[[물귀신|우리가 못 가지면 너희도 못 가져]]'란 입장인 프랑스 공사의 눈치를 보면서[* 프랑스는 조선 정부가 타국과 외교 문제를 빚을때 중재해줄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간 탓에 뒤따라온 영국이나 독일 등의 열강들도 프랑스의 눈치도 보이고 해서 함부로 불평등조약을 맺지 못하고 조불수호조규와 비슷한 수준의 조약만을 체결할 수 있었다. 특히 벨로네 공사는 베르뇌 주교 건으로 최소 자기 모가지가 걸린 상당한 정치적 약점이 잡힌 터라 타 열강이 조선에 손아귀를 뻗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어 불평등조약이나 이권 침탈의 조짐을 보이면 강하게 반발하며 무산시켰다.] 이권침탈적인 조항을 넣지 못해 순조롭게 문명개화의 첫 단추를 끼운다. * '''[[태극기]]''' 원 역사에서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탄생했지만 본작에서는 상술한 을축양요 때 귀남이 우리가 아는 그 태극기를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 * '''[[통리기무아문]] 조기 설치''' 원 역사 1880년보다 14년 빠른 1866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됐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 조선의 개항이 앞당겨져 발생하지 않았다. 해당 선박은 일본에서 변을 당했다. 따라서 자동으로 신미양요도 발생하지 않았다. * '''[[수신사]] & [[조일수호조규]]''' [[조선 통신사|통신사]] 파견을 [[조공]]으로 왜곡한 '야도 마사요시'[*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를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수신사 파견이 원 역사보다 9년이나 빠른 1867년에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 조항 없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서 체결됐다. 그런데 조일수호조규에 '조일 양국은 자립국이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자주국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이에 격분한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테러를 감행하였고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신사가 타고 온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해 자칫하다간 [[민주주의/밈|자국의 재산인 선박을 잃은 미국이 개입할 여지]]가 생겼다. 이로 인해 조약 재개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결국 일본은 대외적으로 자'주'국이 아니라 자'립'국이 됐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 [[운산 금광]] 조기 개발''' 오페르트가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을 생각으로 왕실에 접근했다. 그런데 고종 안에 있는 사람이 전생에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해본 적 있어[* 노인이 되어 군밤장사를 하며 모은 자그마한 돈이라 큰돈은 아니었기에 귀남은 사기꾼도 얼마나 살기 팍팍하면 없는 노인 돈을 가져갈꼬 하며 한편으로는 혀를 끌끌 차며 측은해했다.] [[자본주의]]의 매운맛을 무척 잘 아는 귀남이었기 때문에 금은 [[외환보유고|나중에 필요할 때를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오페르트는 일단 이 시점에 [[외환보유고]]와 [[금본위제도]]를 떠올린 귀남을 보고 경악했다.] 광산을 잘 보는 오페르트에게 다른 유용한 광산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결국 오페르트는 생각도 못한 '이광도감'의 '도청'이라는 광산 개발 총책임자로 임명돼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색목인 [[당상관]]이 되었고, 후원을 받았던 서양 외교관들은 처음부터 조선의 공직을 목적으로 자신들을 속였다고 적대하여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고, 광산 개발이 나라의 공식 사업으로 추진됨에 따라서 이권을 챙기려고 할 때마다 조정의 관료들이 매의 눈으로 달려드는지라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됐다. 이후 30년 동안 말이 당상관이지 급여 받는 공노비 신세로 굴려졌으며, 외국인으로 '장성공' 시호까지 받아 대감님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출세는 하였으나 퇴직할 때까지 한 고생이 공조에 구전된다. 그래도 수염과 머리가 허옇게 될 즈음엔 서른 살 어린 조선인 아내도 얻었고 수십 년 동안 한 업계에 눌러앉아 나름대로 입지를 다진 덕에 자기를 배신자라며 매정하게 대했던 서양 기업인이나 외교관들마저 함경도 광산의 떡고물 좀 나눠 달라며 선을 대려고 고개 숙이는 게 싫지는 않다고. * '''[[토지개혁]]'''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해 유상매입 무상분배를 골자로 한 토지개혁 '명전법(名田法)'을 시행했다. * '''[[의회]] 설치''' 1868년 귀남이 [[홍재학]]의 상소를 읽고 '세력 있는 자들의 핍박 없이 견식 있는 선비들이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나누고 중의를 모아 건안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고 하교하여 각 군현에서 추천을 받아 종4품 '참의대부(參議大夫)'로 임명된 자들이 한양에서 정기적으로 회동하여 국정의 특정사안을 논의토록 하는 '참의원(參議院)'이 탄생했다. 참의대부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이 조건만 충족한다면 외국인이나 여성이라도 참의대부가 될 수 있다. 정확하게는 여성의 정치참여가 당연하다고 여긴 진보주의적이었던 귀남이 외국인과 여성을 금지하는 것을 깜빡한 거지만. 덕분에 첫 참의원 선거에서 파리 코뮌 출신 [[프랑스인]] 참의대부가 나왔다. 자신들이 쫓아낸 이가 조선 의회에 당당히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에서는 놀라움 반 씁쓸함 반의 반응을 보였다. 국제 제정 이후 재건된 경복궁에서 귀남이 연설을 할 때 일부 참의대부들도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보아 참의대부도 몇몇은 당상관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선수와 직전 지위[* 예를 들어 대통령실 고위 비서였다던가, 행정부 고위직이었다던가, 대법관 출신이었다던가, 지방자치단체장이었다던가 등.]에 따라 실질적인 대우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고려하면 당상관 하다가 참의대부가 된 인물의 품계는 당상관의 품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전국 도로 정비''' 안동 김문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맡아 흥선대원군에게 잘 보여 권세를 되찾으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귀남 본인이 고층 빌딩이 넘쳐나는 유리 도시 서울에 상경해서 그 커다란 건물들이 지어지는 광경에서 살았던 탓에 빌딩을 하도 많이 보고 살아서 큰 궁전에 별로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길거리 장사꾼 출신으로서 잘 닦인 포장도로에 주목해 경복궁에 손을 대기도 전에 엉뚱하게도 '''팔도의 대로'''를 닦게 됐다. 이리하여 안동 김문은 당장은 가세를 길바닥에 쏟아붓게 되었으나, 아니라고 말했다가는 강상죄가 되기에[* 조선 시대 강상죄는 반역죄와 동급의 중죄로 일족까지 연좌로 박살난다. 안 그래도 계혜환국으로 왕실에 찍혀서 정계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겨우 일이 일단락됐는데, 여기에 강상죄까지 더해지면 배은망덕이라며 훌륭한 숙청 명분이 된다.] 결국 전국 각지의 인력과 바다 건너 서양의 기술자를 부르고 돈을 퍼붓다시피 해서 팔도의 길을 닦는 데 전력으로 임했고, 그렇게 19세기의 토목건축 기술력으로 전 국토의 가도를 중대한 사고 없이 정비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국 팔도의 교통이 원활해지고, 안동 김씨도 권세는 줄었으나 팔도의 길을 닦으며 쌓인 노하우를 이용한 토목공업으로 큰 돈을 벌며 다시금 명문 벌열로 도약한다. 이후에도 의외로 큰 문제가 생겼다는 명시적인 묘사도 없고 19세기 말에 한강에 다리를 놓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기술력을 축적했다. * '''[[간도]] 진출''' [[서태후]]가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 빨리 조선의 길림성 일대, 즉 간도 개척을 허용하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경작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 '''[[징병제]] 시행 및 군제개혁''' 1871년에 [[이필제]]가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북벌 운운하며 청국 공사관을 습격해 뒤집어 엎은 사건이 발생하자 귀남이 진심으로 분노해 이필제를 의금부로 끌고 와 국문하였다. 작품 전체에서 귀남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자식들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자 귀남이 양의를 불러 치료를 부탁했음에도 장폐색에 걸려 연달아 병들어 죽었을 때 왕비의 오라비 되는 민승호가 함부로 '양의(洋醫)가 병을 몰고 와 왕자가 죽었다'며 선동을 퍼뜨려 왕비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노했던 일을 제외하면 이게 유일하다. 어찌나 심하게 분노했는지, 이게 후대에는 이야기가 더욱 와전되어서 '주상께서 분노하신 나머지 필제에게 '''[[벼루]]를 [[소현세자|던졌다]]'''는 소문으로 부풀려진다. 철이 들기 전의 경양대군도 이 이야기를 궁궐에 퍼진 풍문으로 들어서 벼루를 필제에게 던진 일이 사실이냐고 귀남에게 질문했을 정도. 여기서 귀남은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을 알고 철이 든다'''고 생각하여[* 귀남 본인이 6.25 당시 징집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그의 첫째 형은 전사통지서 한 통이 되어 돌아왔고, 둘째 형은 한쪽 팔·다리를 잃고 폐인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가 어느날 [[자살|다시 나간 후 실종되었다]]. 본인은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징집되어 사지나 몸은 멀쩡하게 돌아왔으나 빨치산과 지뢰·굶주림·추위에 시달렸고 돌아와 보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먹고 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우마차가 지뢰를 밟고 통째로 폭사하는 끔찍한 장면도 목격한 만큼 전쟁의 잔혹한 면을 두 눈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연병법(練兵法)'이라는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통리아문에서 옮긴 서양 병서를 교재로 사용하는 [[사관학교]] 엄익관(嚴翼館)을 설치하였고 군관과 군졸 사이에 양반 사족이 복무하는 부사관 계급을 신설했다. * '''[[프랑스]] 난민 대거 유입''' 1871년에 [[최익현]]의 활약으로 막판에 정부에 항복한 일부 [[파리 코뮌]]의 구성원 중 천 명 정도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박해를 피해(사실상 프랑스 측의 정중한 국외추방의 형태로) 조선으로 임시 망명했다. 이 난민들 태반이 은행 직원, 학교 교사, 배관사, 회계사 등등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경력 있는 전문직종이라 한창 개혁 중이라 유능한 전문, 실무 인력이 필요했던 조선의 국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됐다. 곁가지로 파리 코뮌의 사상 탓에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가 원 역사보다 빨리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었다. 이후 파리 코뮌에 대한 사면이 실시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퍼져 만민공산당이 세워진 원인도 이들이 좌익 출신이다 보니 이들을 통해서 퍼진 것이다. *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존재 ×''' 물 떠놓고 승은이 내려지길 기도하는 궁녀가 한둘이 아니지만 귀남이 썩 여색에 마음이 없는 관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결국 중전이 아들 셋을 본 데다, 귀남의 뜻에 의해 왕실을 비롯하여 모든 국민에게 축첩 금지 및 궁녀 혼인 허용이 이루어져 귀남에게 서얼은 생기지 않았다. * '''근대 [[신문]]의 태동과 성장''' 앞서 왕자가 병에 걸려 죽었는데 왕비의 오라비 되는 자가 함부로 선동을 해 왕비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짓을 목격한 귀남의 분노를 사 된통 당한 민승호를 본 대원군이 [[민승호]]에게 압력을 넣어 자신의 잘못을 알리도록 '익정신보'를 발행케 하여 원 역사보다 12년 빨리 조선땅에 근대적인 [[신문]]이 탄생하였고 뒤이어 참의원의 각 정파들이 '청구시무' 등 정론지를 발매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를 본 김귀남은 현대 시절 기억을 되새기며 "신문에 광고나 삽화가 없는게 가당키나 한가." 라는 귀띔을 내리면서 [[장승업]]같은 화가들이 만평 작가로 일하게 된다. * '''조선적십자사 창설''' 1872년에 원 역사보다 빨리 발생한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C%9D%B4%EC%99%84_%EC%B9%A8%EB%9E%B5|타이완 침략]]을 계기로 원 역사의 [[대한적십자사]] 창설보다 33년 빨리 조선적십자사가 탄생했다. 여기엔 파리 코뮌 건으로 조선에 망명을 온 [[앙리 뒤낭]]의 도움도 있었고 한동안 뒤낭 본인이 조선적십자사 대표로 있게 된다. * '''노비세습제 폐지 & 우정총국 설치 & 자전거 도입''' 노예제를 폐지하면 차관을 주겠다는 [[글래드스턴]] 행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노비세습제를 폐지했다.[* 원 역사의 고종은 서기 1886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였다.] 조선 시대 중기부터 노비세습제의 문제를 지적하며 노비세습은 없애야 한다는 개혁 논의가 있었는데,[* 조선시대 노비종부법과 노비종모법 모두 노비가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을 정부가 막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최익현은 프랑스 유학 경험으로 유럽의 [[노예]]와 조선의 [[노비]]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영국에게 조선 노비와 유럽 노예의 차이를 명확히 설명하고 옛 성현도 양인을 형벌로서 노비로 낮춘다고 말하기는 했어도 노비 세습을 말하지는 않았으며 나중에 노비 세습이 생겼으니 이는 잘못이라 주장해서 노비세습제 폐지가 채택되었다. 노비가 없으면 서찰은 어떻게 부칠 것이며 가마는 누가 메냐고 투덜거리는 사대부들을 달래기 위해 원 역사보다 일찍 우정총국을 설치하였고 프랑스에서 [[자전거]]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귀남이 '''"백성 중 종복이 없으면 거동할 수 없는 자들은 내 내탕을 털어서라도 자전거든 인력거든 사주겠노라."'''라고 해버려서, 귀남 본인이야 별 생각 없이 말했겠지만 왕실 권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사대부들은 그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노비세습제 폐지와 별개로 현직 노비들을 다 풀어주었다는 언급은 없지만 정황상 조선 국제(헌법) 제정을 하면서 노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머슴]]으로 전환되며 신분제가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만민공산당의 주요 표심 중 하나가 무당, 백정 등 신분제로 인한 사회적 약자이므로 이들이 다른 양인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를 적극적으로 외쳤을 것이다. * '''조러수호조약''' [[녹둔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러시아 간 국경을 확정하고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것 때문에 국경 확정 건에서 한발 물러나 녹둔도 전역을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기까지 한 것.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규모로 이루어진 조선 농민들의 대규모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추운 북방 땅에서 굳이 남방에서 자라는 곡식을 키운다며 비웃던 러시아 관료들이 정신차려 보니 '''온 들판을 노랗게 물들일 정도로 잘 익은 벼밭'''을 보면서 아연해하는 장면은 실로 일품. 당황한 러시아 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런저런 행정조치를 취해 봤지만 아직도 중세적인 관습이 남아있을 정도로 뒤떨어지던 러시아 제국의 행정 능력은 일반 민중들도 관청에 민원 넣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던 조선 백성들에겐 너무나 어설펐고, 결국 이런저런 경로로 우회해버리고 만다.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도록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러시아 측에서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으니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조선으로 [[귀화]]하는 우회로를 쓴 서양인들이 당당하게 조선 호패를 들고 나는 조선인입네 하며 장사하러 드나든다고. 조선 정부에서도 그들은 조선으로 귀화했으니 조선인이 맞다고 인증해버리니 이들도 법적으로 조선인으로 대해야 하는 무라비요프 백작으로는 뒷목 잡을 노릇.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신흥 시장인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조선의 반응은 "어찌 나라 간에 맺은 조약을 한 해도 되기 전에 바꾸겠는가.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보자."였다. 한 마디로 '''"응, 싫어."''' * '''참의대부 추거 실시''' 참의대부는 향회의 추천으로 뽑게 되어 있는데 한성에서는 그 제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1874년부터 한성 5부에 한해 참의대부를 선거로 뽑기로 하였다. 유권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자서식 투표이며 돈을 주고 추거단자(투표용지)를 사야 했다. 이후에는 유권자들이 서당 및 향회에 모여 투표하게 되면서 추거단자 판매는 사라졌지만, 이 때의 관행이 남아 유권자를 '매단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 정치권력을 잃은 벌열·거족들이 개화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둘씩 문중의 가산을 털어가며 각종 사업에 뛰어들어 자본가(재벌)로 거듭났다. 예컨대 안동 김문은 --경복궁 세우려다 팔도의 길을 닦으며 생긴 짬을 살려-- '광통이도국'이라는 회사를 차려 건설업, 풍양 조문은 무역업, 반남 박문은 연해주로 진출해 제지업으로 목돈을 만지고 있다. 원 역사의 [[삼성]]과 [[LG]] 등도 양반가들이 세운 대기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다. 1866년 서얼허통이 이루어지자 명문가의 서얼들이 과거 대신 자발적/강제적으로 상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 '''만민공산당 출범''' 흥선대원군이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백성의 9할은 될 자잘한 백성들, 즉 [[무산계급]]을 근왕파로 육성하기 위해서 자기 입맛 대로 뜯어고친 [[공산당 선언]]을 정강으로 채택해 훗날 만민공산당 이야기를 들은 [[칼 마르크스]] 피셜 '''사이비 공산당'''을 창당했다. 일례로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문구를 '이처럼 위정의 도가 어그러지면, 잃은 것은 쇠고랑뿐인 가련한 백성들이 천하를 뒤엎고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만국의 빈궁한 이들이 장차 함께 반민이 될 것이니 천하의 대란이 일어날 근원은 여기에 있도다!'로 옮겼다. 이때가 1874년으로 원 역사의 [[고려공산당]] 창당보다 무려 45년이나 빠르다. 수장이 흥선군이라 흥선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안서의 비호를 받고 있어 '''왕의 아버지가 당수로 있는 공산당'''이라는 기이한 타이틀을 가진 정당이 되었다. * '''전보 체계 구비''' 원 역사보다 11년 빠른 1874년에 팔도에 전보 체계를 갖추었다. 전선이 들어오고 상술한 것처럼 길이 닦이면서 봉수대와 역참에 묶여 있던 양민들 중에서 머리 좋은 이들은 전신국, 몸 멀쩡한 이들은 우정국의 직원으로 임명됐다. * '''월남 평화유지군 파병'''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9D%B4%EA%B3%B5_%EC%A1%B0%EC%95%BD|제2차 사이공 조약]] 체결을 두고 원 역사와 달리 프랑스와 힘싸움을 벌이던 청국이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자 자칫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수가 있으므로 숙고 끝에 지전보평군이라는 이름으로 평화유지군을 월남에 파병하여 두 대국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사이공 조약의 내용도 원 역사와 달라졌고, 결과적으로 [[청불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개변된 역사 문서의 아시아, 월남 문단을 참고할 것.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규모가 크게 확장되어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 광둥성과 광시성.]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 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주식회사인 동양철도, 줄여서 '''동철'''이 설립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 회사들이 지나치게 큰 사업 계획을 듣고는 난색을 표했으나, 비용과 자원을 엄청나게 쓰지만 사업의 타당성이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논의 끝에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 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지었다.[*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철광이 있다.]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 거라고 말하는 걸 보면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 예정대로 부분부분 개통한 철도에서 이익을 창출해 재투자하기 시작했다고. 이는 본래 역사와 달리 청국의 내정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1895년 당시 신의주~북경 노선이 개통되었다는 언급이 있기 때문에 초기 예상보다 빨리 지어지는 듯하다. 이후 서태후가 '''주식회사에서 과반의 지분을 차지해 최대 주주가 되면 회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주식회사의 법칙을 깨닫고 황실 내탕금을 빼서 무식하게 돈을 쏟아부어[* [[원명원]] 재건 자금과 황실 보물들을 썼다고 한다.] 동철 주식을 마구잡이로 사들인 결과 지분의 과반을 차지해 '''동철을 자기 손에 넣는다.''' 서양 투자자들은 [[그그실|그걸 진짜로 하냐며]] 뽑아도 뽑아도 끝없이 나오는 청나라의 재력에 경악했고 영국에서는 아편전쟁때 북경 보물창고 안 털고 뭐했냐며 배아파했다.[* 본작 청나라가 2차 아편전쟁 이후 전쟁과 내전, 군벌기를 아예 겪지 않았기 때문에 재정이 남아서 가능한 것이긴 하다.] 여담으로 주식은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에 정황상 서태후 사후에는 청나라 역대 황제들이 해당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도중(都中)[* 조선 중기 이후 육의전 상인의 조합. 군밤 세계관으로는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인정''' 1874년, [[장승업]]의 신보도중(신문노조) 결성을 계기로 산업화 과정에서 안 그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처이는 것을 서럽게 여기던 고공들이 너도 나도 우리도 나랏일을 한다며 도중을 결성하여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에 [[6.25 전쟁]] 때 경험으로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귀남이 처음에는 강경진압을 생각했으나 아무리 빨갱이라도 백성은 백성이니 마음을 바꿔 고공들을 '존중'할 것을 지시하였고 '[[담합|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모이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모든 공장과 국의 고공들에게 관아에 신고하여 도중을 꾸리는 것을 허여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노동삼권]] 중에서 단결권을 인정한 셈이다. 심지어 법에 준하는 왕명이기 때문에 강력한 왕실의 권위 덕분에 현대 기업들의 무노조 경영이 원천봉쇄되는 효과도 있다. * '''익문사 혁파 및 공안서 설치''' 1874년, 도중 노동쟁의 당시 무력충돌을 일으켜 약간의 트러블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익문사를 폐하고 그 대신 조선식 [[헌병대|헌병군]]인 '공안서'를 설치하였다. 간판만 바꿔 단 대원군의 사병이라는 점은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일단 겉으로는 총관을 따로 두었고 기무회의 의결에 따라 움직이도록 통제의 여지를 늘렸다. 대원군의 사병이기에 대원군의 정당 만민공산당에게 우호적이다. 팬덤에서는 '공장주가 노조와 싸우면 비밀경찰이 공장주를 잡아간다', '19세기판 [[암행어사]] 아냐?'라는 농담이 돌았다. * '''[[명성황후]]의 대군 출산''' 원 역사처럼 명성황후의 첫 아들과 둘째가 사망했을 때 귀남에게 호되게 질책당해 한 번만 더 잘못되면 모가지가 날아갈 것을 깨달은 내의원이 허겁지겁 서양 의학을 받아들여 원 역사와 달리 세번째, 네번째 대군은 죽지 않고 생존했다. 그러므로 본작에서는 세자, 즉 미래의 순종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동아들이 아니다. * '''[[사법부]] 설치''' 귀남이 양이의 기물이 들어오면서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최익현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 사람들 할 일 중 세인의 존중도 받을 일이라면 역시 판검사라며 '''일자리 정책의 일환으로''' 행정권력에서 벗어난 근대화된 사법부를 설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도 나오게 되나 헌법 제정은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 전국 팔도 감영과 개시 둔 도시에 형송의 일을 다루는 판심청을 두었고 그 위로 최고법원 평리원을 두었다. 평리원 소속 법관들이 경복궁 재건 행사 당시 궁 내에 들어와서 귀남의 연설을 듣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최고 법관들은 당상관 대우를 받는 듯하다. * '''화서학원 & 노사학원'''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 각각 안동 김문과 대원군의 후원을 받아 [[대학|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화서학원과 노사학원을 차렸다. 화서학원은 원래 귀남의 사액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악필|어필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제자들이 극구 사양하고 제수만 받았다. * '''[[경인선|한성-제물포 철도]] 부설''' 동철에서 몇 리 쯤 미리 놓아서 시범을 보일 심산으로 제물포부터 한성까지 가는 철도를 놓았고 원 역사보다 23년 빠른 1876년에 개통되었다. * '''[[손탁호텔]]''' 베베르의 조선 부임이 앞당겨지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공친왕의 심복 마신이의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임시 호텔이었다고 한다. * '''[[1877년|정축년]] [[북벌]]'''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홍장]]과 미리 합의했던대로 [[동삼성]]에 나가 있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병력 1만을 파견하여 제일 먼저 입국신고부터 한 뒤 아사 직전의 난민을 구휼하고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등 민심을 수습했다. 규모로 따지면 전조 이래 처음이라 하여도 얻어낸 땅덩이는 없고, 일만 명 장졸을 해외로 보내서 먹이는 것도 모자라 또 인근 마을에 구휼까지 하였으므로 고스란히 그 해 재정은 왕실 곳간 헐어 충당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도성의 신보란 신보는 모두 박규수와 대원군의 손아귀에 있고 두 사람이 이번 출병을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만족하였으니 감히 얻어낸 것 없이 국용만 축냈다고 글로 비방하는 이는 없었다. 호조판서 김병시는 전비를 너무 많이 썼다며 이를 갈았지만. * '''[[노벨상|노씨권학상]] 제정''' [[노벨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귀남이 다이너마이트의 군용 판매를 허락할 수 없다는 [[알프레드 노벨]]을 설득하기 위해 판매 기금으로 매년 전 인류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 우수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표창할 것을 제안하여 유럽 학계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가운데 원 역사보다 20년 빨리 수상을 시작했다. 조선에서 심사하고 수여하기에 수상 분야에 '''유학'''이 추가되었다. 현실 노벨상과 같이 노씨권학상 역시도 살아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오늘내일하는 통에 정신이 없더라도 수상 가능.]에게 수상되고 있다. 유학상은 조선에서 다 받아가는 반면, 과학 부문 상은 서양인이 전부 휩쓸어가는 상황인데 [[굴리엘모 마르코니]]와 [[드미트리 멘델레예프]]를 제외한 모두가 성의 없는 답례만 보여 심사위원들을 무안케 하고 있다. 원 노벨상과 달리 수학 부문이 있는데, 수학이 어찌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냐는 노벨의 말을 듣고 온종일 호조탕약에 절여진 채 국고의 세출입을 세고 있는 호조판서 홍종우가 분노하여 산학이 쓸모없다고 하는 놈은 대야에 호조탕약을 가득 담아 칠공(七孔)을 탕약으로 절여주겠다[* 눈구멍 둘, 콧구멍 둘, 입 하나, 귓구멍 둘. 즉 [[에스프레소]] [[물고문]](...)]고 날뛴 끝에 추가되었다. * '''[[1878년|무인년]] 은 소동''' 개화당에서 [[은본위제]] 실시를 강하게 주장함에 따라 소문이 빠른 이들이 너도 나도 쌈짓돈을 털어 은을 구매했다. 그런데 공산당이 강하게 반대하여 은본위제 도입이 없던 일이 된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면서 도성 저자에 끼었던 거품이 순식간에 터져 은값이 폭락하고 만다. 그로 인해 비록 수는 적으나 패가망신하여 거리에 나앉은 이들이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마땅히 구휼해야 하는가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고 귀남이 생각 끝에 민자영의 제안대로 세곡을 풀어 저자의 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어윤중과 김옥균에게 이렇게 백성들에게 사들인 '''은 사백만냥'''을 들고 청국으로 가 제조국을 돌면서 병기든 사람이든 도움 될 이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훈련함 비연호를 타고 상해로 간 윤중과 옥균은 강남제조총국을 포함해 양강 일대의 공창을 후원하는 조건으로 재주 있는 공인들을 대거 스카웃하고 강남제조총국 등의 이권을 보장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 '''대조선국 국제'''(國制) '''제정''' 3년간에 걸친 논의 끝에 원 역사의 [[대한국 국제]]보다 21년 빠른 1879년에 제정되었다. 무한하고 불가침한 황권,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를 강조한 대한국 국제와 달리 [[삼권 분립]]을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통리아문을 의정부 이하 육조와 통합하여 행정부를 구성했고, 참의원의 자리를 입법부로 공식화하였으며, 삼사를 떼어내고 산림의 선비를 채용해 사법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인사권, 법률안 제출권, 위헌여부 심판 등의 권한이 있음을 선포했다. 또한 교육권, 평등권, 언론의 자유 등 백성의 기본권을 보장했다. 법으로써 군주의 위엄과 그 한도를 정하면 '''사람은 착한''' 세자가 용상에 올랐을 때 어지간한 일은 신료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외척이나 권신이 발호하여 왕권을 대신 휘두를 작정을 하게 되면 이를 막을 성벽과 같을 터이니 귀남은 이상의 내용에 만족하였지만,[* 대원군과 왕비 민씨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귀남이 세도정치를 전례로 들어 설득하자 결국 납득했다. 처음부터 침식할 수 있는 권한에 한계가 있다면 그들의 전횡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국제의 특성상 오히려 왕조 교체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입헌군주정 국가들은 나라 자체가 공화정이 되었으면 되었지 왕조가 교체되는 사례는 없다.(프랑스의 부르봉 왕정복고는 외국이 보나파르트 왕조를 폐위하고 부르봉 왕조를 복위시킨 사례라 예외이며, 프랑스 국내에서 왕조가 바뀌었을 때는 모두 공화정을 1번씩 거쳤다)] 신료들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과분하다 할 만큼 내어주는 면이 있으므로 적어도 군주의 위엄을 앞에서라도 세워야 한다는 데 당색 막론하고 합의가 이루어져 국제 1조가 "[[전제군주제|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가 됐다. 그런데 그 다음 조항이 다음과 같다. "[[입헌군주제|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이에 대체 조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천명하고 있다고 보느냐 연일 물어보는 외국 언론사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앙리 뒤낭이 "그래서 이 나라는 입헌군주국인가, 전제군주국인가?"라고 묻자 최익현이 말하기를 "둘 다 아닙니다. 애초에 그 둘의 구분은 서양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과 백성의 도의가 다른 조선에 끼워 맞추려 하니 가당한 이야기겠소? 굳이 따지자면 오직 나라 안 만백성의 이로움과 덕을 위해서 그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전제군주국입니다."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며 이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국에는 유학 경전 이야기 없이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유럽인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 '''[[1879년|기묘년]] 경제공황''' 위에서 설명한 '조선국 국제'에 영국의 입김 닿았다고 확신한 이그나티예프 백작이 한반도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국제를 지금보다 '진중한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조선이 이를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아시아개발은행의 조선 및 조선인 보유 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를 무기한 유보하는 [[경제제재]]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그 동안 호황 일변도였던 조선에 공황이라는 달갑지 않은 객이 방문했다. 사실 아무리 조선이 경제를 개방하고 산업화 발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한들 여전히 그 근본은 농사짓는 데 있어 농업 비중이 여전히 절대다수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가 끊겼다 하여 당장 나라와 백성이 끼니를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이 정도로도 지금까지 성공의 열매만 취해오던 조선의 풋내기 산업가와 자산가들에게는 심대한 충격이었다. 이에 대원군은 연해주에 나가있는 상고와 공인들을 일제히 철수케 하면 저들 역시 사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조치를 물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민자영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개화당을 반자유주의 친러파로 코스프레시켜 화해의 거간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귀남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계책을 모두 취해 조선인들이 먹여 살리는 연해주 전역의 유지들로 하여금 최근 조선이 반포한 자유주의 한법에 서구식 조항을 넣기 시작한 것은 만민공산당인데 이그나티예프의 경제제재는 헌법 초안을 합리적이고 보수적으로 방향으로 수정한 친러파인 개화당을 곤경에 빠뜨렸다며 이로운 이들을 버리고, 그 반대되는 이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됐으니 부디 치명적인 오해가 러시아의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게 만들었다. 차르의 기대를 받고 있는 연해주의 러시아 국민들이 이 청원을 극동 바깥으로 꺼내게 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앙귀족들로부터 러시아의 입지를 제 손으로 삽질해 파헤쳐놓았다는 모함이 자신을 덮칠 것이 눈에 선했던 이그나티예프는 결국 아시아개발은행의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가만히 문명개화를 추진하던 나라가 한 고관의 마음대로 위기에 처할 뻔 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젊은 서생들에게 깊이 새겨졌고, 다른 한편으로 극동의 작은 나라가 친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중 몇몇은 연해주로의 탈출을 고심하게 됐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관리가 느슨해서[* 실제 역사에서 주변 마을 소녀와 애까지 만든 스탈린이 아니더라도, 수용소장의 가혹한 대우에 항의해 독극물로 집단자살한 사례가 있다. 독극물을 대량으로 입수하는 게 가능하다는 이야기.] 탈출 자체는 큰 문제 아니었을 거라고. * '''고시'''(考試) '''실시''' 근래 학도들 사이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국경을 넘어 무산계급을 결집시키기 위한 연대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백인의 의무|유자의 짐을 지어 천하 만방에 참된 개화를 베풀어야 한다]]' 따위의 편벽한 잡설을 유행한다고 하여 귀남이 "그런 소리할 시간에 공부하게 만들면 되겠네."라는 논리로 과거에서 보는 과목에 시무의 대책, 양이의 학문, 거기에 산학까지 추가한 새로운 시험 제도 '고시'를 실시토록 하였다. 게다가 학도들이 엄한 주장을 할 때마다 말 없이 고시 과목을 늘리거나 난이도를 올리는 악마같은 개정을 하고 있다. 심지어 갈수록 업무는 늘어나고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지는데, 이미 중노년이라 새로 뭘 배울 여력이 없는 중신들이 앞다투어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것저것 죄다 시험에 추가하자며 한마음으로 응원중이다. * '''조일동맹 체결''' 이토 히로부미가 친조노선의 선봉장 요시노부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으로써 정한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책자 '일본책략'을 유포하였다. 그런데 새로 만든 국제(헌법)에 따라 대책회의를 참관하던 귀남이 듣자하니 사건 수괴가 '귀남이 익히 알고 있는 나쁜 놈' [[이등박문]]이라, 혹시 그 놈이 나쁜 놈인 것 아니냐고 묻고 신하들도 간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타국과의 마찰을 유발하는 참람된 일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해 그놈이 원하는 게 뭔지 몰라도 생각대로 안 되게 진행하는 방안을 떠올린다. 그것이 조일간에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는 '''결박동맹'''이라 하여 가상적국간에 군사동맹을 맺어 서로의 군사활동을 감시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군사활동도 제약되지만 애초에 전쟁할 생각 자체가 없는 조선에게는 전혀 손해가 없고, 현재 조선의 육군은 20만 명으로 일본의 세 배나 되니 알려져도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오쿠보 내각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일동맹이 성립되자 이번엔 극동의 양대 개화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청국과 러시아가 기겁을 했지만 조선 측에서 어르고 달래며 진정시킨 듯. 한편 불장난이 거하게 실패한[* 작중 묘사로는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 이토는 행동을 같이 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슈 번에게 해군을 넘겨주겠다는 오쿠보의 약속에 넘어가 자신을 팔아버려 권력을 잃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됐다. * '''교린삼장''' 귀남이 서태후의 파천을 계기로 마련한 조선의 외교 [[독트린]]. 약육강식의 시대에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세상의 대세가 서로 물고 뜯는 것이라면 다 함께 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진정한 역천임을 제창하며, 세상은 넓고 우리는 작아 단번에 그런 꿈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우선 우리 주변부터라도 하나씩 무언가를 해나간다면 어쩌면 그런 날이 올 것이라며 이를 꾸준히 지켜온 이래 많은 나라들이 조선의 '선의'를 알고는 있다. 조선의 선의는 일이 꼬일지언정 결과적으로 손해는 안 보기 때문. 1.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를 대함에 오직 예와 의를 지켜 함부로 벗어나지 않는다. 1. 대조선국은 [[상부상조|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게 되면 필히 그 나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1. 대조선국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나라가 도움을 청하면 힘 닿는 한 돕는다. * '''전구 설치''' 원 역사보다 6년 빠른 1881년에 전구를 도입했다. 작중 조선의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구를 도입할 때 덤으로 창덕궁 돈화문 앞 각사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궁궐 근처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도 설치했으며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서 한양 주점 등에서는 자비로 발전기와 전구를 사서 사용하면서 한양 중심으로 [[통금]]이 없어지면서 남녀간에 밤에 만나서 부적절한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일단 발전소를 짓고 한양을 중심으로 한 송전망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 조선에서는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한 회사 맥안공행에서 전구를 생산하고 있다. 에디슨이 조선을 우습게 보고 배상금 지급 요구를 한 뒤 조선의 공문을 배상급 협상하자는 내용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는데, 그게 '조선에 특허권을 등록하면 인정해주겠다'는 공문이었기에 응답이 없자 조선은 다른 전구 특허를 가진 맥심 쪽에 연락해 특허를 사들인 것이다. 에디슨과 전구 특허를 다투던 맥심은 에디슨이 조선의 공문을 무시한 덕택에 자신이 인정받았다고 굳이 감사 편지를 보냈고 --[[티배깅]]-- 에디슨은 자기가 공문 읽을 필요도 없다고 내친 주제에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고 비서를 해고했다. * '''지적재산권법 제정''' 에디슨과 안인수의 전구 특허권 분쟁을 계기로 조선 조정 차원에서 지적재산권법을 마련했다. 그 내용은 미국 내 특허권자가 나선다면 조선에 기술협력을 하고 공장을 세운다는 전제 하에 그 권리를 보장하고 아시아 시장 진출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특허를 자국과 동일하게 대한다는 말에 혹한 수많은 아마추어 발명가들로부터 세계 곳곳에서 특허가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이러한 제정에 큰 기여를 한 안인수와 에디슨 간의 특허 분쟁은 별도의 전구 특허를 가진[* 당시 에디슨은 전구를 새로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전구의 효율성을 개선한 것이었다. 에디슨 이외에도 이런 식의 전구 개선 특허가 비슷한 시기에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 중의 한 명이 맥심.]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하는 걸로 끝났다. 한편 의외로 맥심과 에디슨 사이의 경쟁이 지적재산권법을 계기로 다시 불붙게 되었는데, 에디슨이 발전기 특허를 내면 맥심이 교류전원장치 특허를 제출하는 등의 진흙탕 싸움이 되며 수많은 특허들을 제출해 그 특허들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은 호조와 공조의 업무만 배로 늘어나 [[야근]] 문화가 정착되게 되었다. * '''커피''' 어느 정도 개방이 된 시점[* 119화 39. 배우고 때로 익히면(2)]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은 한 숙수가 귀남이 전생에 마시던 커피를 재현해내자 주인공이 좋아해 포상을 내렸다는 언급이 나왔다. 귀남 전생 시기의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감안하면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일 것인데, 그걸 19세기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해당 작품의 첫 광기를 19세기에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 맛 커피를 만들어낸 숙수의 등장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이 커피는 파리 박람회에까지 출품되었다. 여담으로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도 퍼졌는데, 근대화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호조[*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을 모두 합친 기구. 나라의 부(富)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은 6조 관청인데 조선이 근대화를 하며 수출입의 일이 크게 늘어나고 특허 문제를 공조와 나눠 맡으며 업무량이 가중되었다.] 관원들이 즐겨 마셨던지라 호조탕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 전생에 먹던 커피보다 저렴해서 계사황란 중에는 귀남도 이를 마셨다. 커피 문화는 이후에도 계속 퍼져 동방가배지국이라는 속언까지 나왔다. * '''국문교정청 설치''' 1884년부터 경서를 모두 언해로 옮기고 시권을 [[한글|언문]]으로 써서 내도 가감 없이 그 내용만으로 판단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국문교정청을 두어 나랏말의 이치를 궁구하고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 '''정동구락부 & 장동구락부''' 안인수의 아들 안태훈이 원 역사에서는 구미인들의 사교단체였던 정동구락부([[클럽]])를 차렸다. 그리고 이에 질 세라 전 영의정 홍순목의 늦둥이 홍영식이 한양 제2의 구락부 장동구락부를 꾸렸다. 정동구락부는 말만 클럽이고 실제로는 다점에 불과하지만 장동구락부는 양주·연초·당구도 있는 곳이라 그런 여유를 즐길 만한 자제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이 났다. 여담으로 정동구락부는 작명을 하느라 여러 번 간판을 바꿨다고. * '''遠國과 隣國의 事情을 論함'''[* [[먼나라 이웃나라|먼 나라와 이웃 나라의 사정을 논함]]] 박규수의 유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의 패러디다. 내용을 보면 [[지구 구형론|둥근 이 세상]]에 [[중국|가운데]]가 있을 수 있냐고 지적하면서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중원 땅의 문물만이 가장 뛰어나며 이는 문헌으로 증험할 수 있다고 하는 의론이 어찌 우활하면서도 무서운 말이 아니겠냐]]고 통렬히 비판했다. 동시에 대서 땅에도 이와 비슷한 의론이 있으니 저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 것도 아니요, 저들이 그르고 우리만 옳은 것도 아니므로 화이를 가름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고 억만 백성이 함께한다면 능히 만천하가 문명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글이 [[한글|언문]]이고 띄어쓰기 및 여러 문장부호를 도입하여 한문을 몰라도 읽을 수 있어 백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중에서 이 언문 표기에 대해서도 논박하며 정당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청국에 '만국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경복궁]] 재건''' 대원군의 조바심으로 당백전 발행 등 온갖 무리수가 동원되었던 원 역사와 달리 귀남의 엉뚱한 발언으로 전국 팔도의 길부터 닦는 것을 시작해 팔도의 대로가 닦인 뒤에도 재건할 경복궁 건물들을 옛 문헌들을 참조해 꼼꼼히 설계하는 것으로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조선이 충분히 강성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공사가 진행되어 '''원 역사보다 19년 느린 1886년에''' 경복궁이 재건됐다. 처음 설계할 때 서양식 전각도 하나쯤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창덕궁에 이미 하나 있기도 하고 명색이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로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고 하여 불발되었다. 그리고 사정전에 전구 하나 설치한 것이 끝일 정도로 서양 기물을 들이는 것을 최대한 배제했다. 대신 후원 한 구석에 조선과 서양의 공법이 어우러진 전각 '경무대', 즉 [[청와대]]를 만들었고 이곳은 국무회의 장소로 쓰이게 됐다. 당연히 귀남이 반쯤 장난삼아 지시한 것이다. 한편 일찌감치 공사가 끝난 새 참의원 건물은 경복궁 재건이 완료되자 함께 준공식을 열었다. * '''[[체스]] 유입 & [[바둑]] 전파''' 연해주 다녀온 사람들을 통하여 퍼졌는데 사람들이 '[[마우재]] 장기'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바둑]] 또한 유럽으로 퍼졌다. 본래 역사와 달리 한국식 발음인 Baduk으로 전파된 것은 덤. * '''[[환관]] 채용 중단''' 1885년 가을부터 내시에 환관(고자)만을 선발하는 제도를 폐하였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였으나 귀남옹부터 시작하여 차츰차츰 모두가 목소리 굵은 내시에 익숙해졌다. * '''안정여숙'''(安貞女塾) 카를 마르크스의 딸 엘러노어 마르크스가 입국 중 자신에게 치근덕대던 조병갑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면서 세간의 입소문에 오른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해 고민하게 된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안정여숙이라는 여학교를 차렸다. 여담으로 무려 만민공산당 이념 제시자인 칼 마르크스의 딸이자 만민공산당원 전봉준의 여자라는, 빽이 거의 이항로의 자손 수준으로 대단한 인물에게 치근덕대다 한대 맞은 조병갑은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했다고. * '''전국 참의대부 추거 실시 및 총리직선제 도입''' 참의대부의 임기를 정하지 않아 한 사람이 계속 연임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한성에서 제한적으로 실시했던 참의대부 추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영의정 겸 총리대신도 추거로 뽑기로 했다. 조정 대신들이 조금이라도 추거제를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가산에 따라 1인 1표 이상 던질 수 있도록 하자", "공개 투표로 하자" 등 이런저런 택도 없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3.15 부정선거|그 옛날 전국을 뒤집어 놓은 부정선거]]를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그러면 벼락부자한테는 투표권을 주고 가난한 선비에게는 투표권을 안 주는 게 되지 않느냐", "여기 있는 대신들도 내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대의사를 내기 힘든데 일반 백성들은 오죽하겠느냐"라며 전부 반려해 현대의 선거 4원칙 중 3가지, [[직접 선거]], [[평등 선거]](1인 1표제), [[비밀 선거]]가 도입됐다. 선거권에 있어서는 [[보통 선거]] 원칙은 적용되지 않았고 나라에 내는 부세로 우선 거르되, 향시를 통과한 이들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재산만이 아닌 교육 수준이라는 조건을 집어넣었는데 향시가 서원이나 향교의 졸업 시험에 가까워지며 선거권자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이다. 팬덤에서는 투표권 확대 관련 시위가 "공부해서 향시 합격하면 되잖아."라는 이유로 원천봉쇄되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또한 유권자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면 우매한 민중으로 인해 [[중우정치]]로 변질되는 사태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 '''[[자유당(1951년)|자유당]] 창당''' 참의대부 전국 추거 실시를 계기로 총리 출마에 마음을 굳힌 최익현이 박은식이 꾸린 자강당을 기반으로 실용적 자유주의를 채택한 자유당을 창당했다. 안인수의 도움으로 광통교 옆 인적 많은 곳에 당사도 차렸다. * '''[[새마을운동|신촌향약]]'''(新村鄕約) 국력을 기르면서도 동시에 백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귀남의 기억 속 [[새마을운동]]과 최익현이 방도로 내세운 향약이 만나 시작된 사업이다. 그 내용은 초가지붕 교체, 민둥산 녹화, 종두법 보급 세 가지 중 하나만 우선 해줄 테니 각 고을에서 알아서 '''한 가지 청'''만 정해 내놓으라는 것.(예산 부족 때문.) 같은 고을이라도 사는 곳이나 처지에 따라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 의견도 제각각에 [[혼돈 파괴 망각|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졌고, 이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뒤처지면 고을의 지식인인 자신들이 욕먹을 것을 걱정한 각 지역 사족들이 양민들에게 하나씩 양보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원시적인 형태의 [[지방의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후 지방의회에서도 '개화된 법도'에 따라 선거도 도입하고 제대로 된 의회 구실이 갖춰지고 있다. * '''단발''' 긴 시간에 걸쳐서 풍속의 변화가 일어나 단발에 대한 인식이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도 있다'가 됐다. 그래서 나라에서 딱히 단발령을 내린 적은 없지만 도성이나 인천 부근에 단발하고 다니는 사내가 늘었다. 개중에는 망건으로 쓸어올려 상투 시늉은 낼 수 있을 만큼 절묘한 길이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동삼성과 인접한 의주에는 더 많다고 한다. * '''1889 [[파리 엑스포]]''' 원 역사와 달리 '해동문화각'이라는 독립적인 국가관을 차렸다. '''왕실 레시피 인스턴트 커피'''와 서양 언어로 번역한 서적을 출품하고 자개와 옻칠로 꾸민 공장 기물을 전시해놓았다. 따로 자리얻은 광통이도국은 코닥 사의 협력을 얻어 조선의 명승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였다. * '''[[학사장교]] 도입''' 모름지기 사내라면 군대를 가야 한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세자를 비롯한 대군들의 군 입대가 현실이 되자 무품 종친들을 병으로 굴릴 만큼 담력이 강하지 못한[* 현실에서 영국 왕실 종친이 모범을 보이기 위해 현역으로 활동하다 짓궂은 상관에게 갈굼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김귀남 치세에 들어 위상과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조선 왕실에서 그러다가는 김귀남이나 종친의 뜻이 어찌 되었든 간에 신료들과 대원군이 노발대발하며 바로 '''공안서로 끌려가서 [[코렁탕|밤새도록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호조식 고문법이라 불리는 호조탕약을 칠공에 집어넣을 수도 있고.] 군내 인사들이 이 기회에 막료 체계를 가다듬자는 생각으로 향시를 통과하거나 대학원을 마친 이들은 참위(=소위)로 종군케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 '''축첩제 폐지''' 귀남이 옥균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0년에 축첩제를 폐지하였다. * '''궁녀의 결혼 허용 및 명부사 창설''' 조 대비(신정왕후)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궁녀들이 불쌍하지 않냐며 다른 곳은 몰라도 왕실은 축첩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귀남이 그렇다면 이제부터 궁녀들의 결혼을 허용하면 되겠다고 반응했다. 궁녀들이 궁 바깥과 혼맥이 생기다 보면 궁 안의 정보가 바깥으로 새나가는 문제가 생길 테니 이를 통제하기 위해(그리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해 궁 바깥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내명부와 외명부를 합쳐 명부사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중전 민자영이 그 수장이 된다. * '''조일동맹 파기 및 조러불동맹 체결''' 파리 엑스포에서의 제의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영국이 독일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위대한 고립을 끝내려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영일 동맹을 맺자 조선에 제의한다. 이에 귀남은 조선은 러시아에, 일본은 영국에 붙어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에 힘쓰고 만약 조일 간 싸울 일이 있다면 싸우는 시늉만 내자고 제의한다. 이토는 이에 동의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조선이랑 전쟁이 나면 이기든 지든 자신은 숙청되는지라 조일 간 전쟁이 나지 않도록 힘쓰려 한다. * '''세자의 국혼''' 세자 이척이 원 역사의 세자빈이었던 순명비 민씨가 아니라 광산 김씨의 영애 김명숙과 결혼했다. 원 역사와 달리 여흥 민씨가 외척이 되었다고 권세를 누리기는커녕 다른 세도가에게 얻어터지거나 중전 민씨에게 버림받는 등의 불이익을 겪었기 때문에[* 그래도 사업으로 재벌화되어 나름 재기했다는 언급은 있다.] 이번에는 고사해서 벌어진 결과였다. * '''무치춘일기(霧峙春日記)''' 김옥균이 세도가 징벌 여론을 달래기 위하여 대원군과 조력을 받아 내놓은 일종의 [[팩션]]. 작가는 원 역사 신소설의 아버지인 [[이해조]]로 경화시보에서 연재되고 있다. 상갓집 개라고 불리던 대원군을 모티브로 삼은 주인공 '이하영'이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세도가와 암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김동인]]의 작품 '운현궁의 봄'의 패러디다. 제목 무치춘을 직역하면 '안갯재의 봄'인데 안갯재는 '구름재', 즉 운현궁이다. 그러니까 '운현궁의 봄'이 '안갯재의 봄'이 된 것이다. 조금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어디 산구석 촌부면 모를까 첫 구절만 들어도 대원군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무치춘일기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운현궁의 봄은 그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실제 대원군은 젊은 시절 상갓집 개나 파락호와 거리가 먼 모범적인 종친이었다.] 무치춘일기는 작품 내적으로 대원군의 회고록이나 다름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메타적으로 생각하면 실제 역사보다 본작 내 대원군의 인생이 '운현궁의 봄'에 가깝다. 조선의 주요 정치인인 대원군이 연관된 만큼 일본이나 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일생동안 대원군과 정치적으로 치고받은 오쿠보 도시미치도 이 소설을 즐겨 읽었을 정도. 오쿠보 피셜 글 자체로도 꽤 재미 있었단다. 공개된 내용은 어린 안중근이 조부 안인수에게 읽어주는 첫 문구 정도지만 그것이 '''"[[나를 위해 살겠다|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노라.]]"'''로 시작하리만치 강렬한 자아를 표현하고 어둠 속에서의 암투를 생생하게 그려내었기에 일부 팬덤은 '해외에서 조선 선비들 이미지 어쩔ㅋㅋㅋㅋㅋ'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 '''[[광개토대왕릉비]] 발견''' 원 역사와 달리 조청 합동발굴단이 1892년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혹시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까 걱정하였지만 정작 조선의 학자들은 하남성에서 발견된 [[은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 '''양력 및 개국 기년 도입''' 조선 개국 500년을 기념하던 중 서양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화당이 제2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세도 늘었겠다 역법을 고치자고 제안했고 받아들여진다. 이를 주청 조선 공사 송헌빈이 광서제에게 알린다. 원 역사의 [[갑오개혁]]으로 인한 개국 기년 사용보다 약 2년 정도 빠르다. * '''계사황란''' 청나라에서 황제 주도로 토지개혁을 펼치면서 반발이 이어지자 군을 동원하여 이러한 반발을 억누르기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조선의 상인들과 관계를 맺던 지주들이 피해를 입게되자 소비위축을 염려한 조선 주식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원 역사의 1893년 미국발 공황까지 겹치면서 이 여파는 조선 전체로 퍼져 다음 해인 1894년까지 많은 이들이 경제난에 시달린다. 이에 귀남은 조정을 믿고 기다리라는 어지를 신보에 싣는다. 해당 챕터의 이름은 겨울밤 화롯가, 그러니까 [[프랭클린 D. 루스벨트|노변담화]]다. * '''[[독도]] 분쟁 및 [[조선왕조실록|실록]] 공개'''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유럽에서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었기에 일본과 손잡고 가짜 분쟁을 벌여 유럽의 동맹국에게서 차관을 들여올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일본 측의 실수로 독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학술적으로 해결하려던 중 학자들이 원할 시에 실록을 열람하는 것을 허가하게 된다. * '''[[경제개발 5개년 계획|경제개발 오개년계획]]'''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어윤중이 제안하고 귀남이 본래 역사에서 떠올린 이름을 붙인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을 실행한다. * '''[[유대인]]의 조선 정착''' [[드레퓌스 사건]]이 조선의 개입으로 해결된 후 귀남의 호의로 내수사의 토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의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알려졌다. * '''[[을미정난|을미년 만주출병]]''' 안 그래도 청의 변법 때문에 경제적 피해가 막심한데 북양군이 조선의 지분이 들어간 한양조병창의 운영에 개입했다. 이를 거둬 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친조 인사인 광서제를 반조 인사인 원세개가 사실상 유폐시킨 뒤 계엄령을 선포하자, 조선에서는 천자께 지부상소를 하러 가는 유생들을 호위한다는 명분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여 60만 대군을 소집시키는 한편, 최익현과 황현 등 도끼를 든 유생들을 앞세운 30만 명의 병력을 압록강 너머로 파견했다. 이게 뭔 황당한 소리냐 싶겠지만 주나라 때부터 이어지전 중국의 천조 질서 아래 천자를 유폐한 반역자들을 번국이 구출하는 것은 명분상 '''가능했다'''. 이 때문에 북양군에서도 이 명분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했고, 강남에서 북양군에 대한 물자 지원을 끊으면서 간접적으로 조선의 명분을 지지했다. 원세개의 발악으로 산해관에서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유폐를 탈출한 광서제가 성단을 내려 파면하며 원세개는 몰락했고 조선의 강남 이권을 재확인받았다. 그리고 조선 기준으로는 작은 돈이 아니지만 청국 기준으로는 미미한 소정의 배상금을 받았다. 청나라도 2차 아편전쟁 이후 전쟁 없이 정세가 안정을 찾아서 돈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불만 없이 내주었고 제3국에서는 고작 그 정도 배상금만 받냐며 어리둥절해했다. 한편 광서제가 천조 질서를 철폐하면서 더 이상 [[이등체강]]이 아니라 의전상 동렬이 되었고, 과거 [[병자호란]]의 상처를 가진 삼전도비도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받으면서 양국간의 오랜 원한도 종식되었다. 이런 [[북벌]] 아닌 북벌로 조선 후기부터 청나라에게서 원하던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 '''[[영은문]]과 [[삼전도비]] 위치 이전''' 광서제가 공식적으로 사대질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에 따라 병자호란 이래 250여 년 만에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하며 조선이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국이 되었고 이에 김가진이 영은문과 삼전도비를 정초에 '''[[조선총독부 청사|폭파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청을 지나치게 자극함이 도의로 보나 실리로 보나 옳은 일이 아니란 의견이 많아 모화관으로 옮겨 후대의 참고할 바로 삼기로 하였다. * '''[[그린피스|녹화회]]''' 운산에 광독이 점차 퍼지게 된 것을 계기로 신물질의 유해성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녹화회가 발족했다. * '''[[해수구제사업]]''' 조선의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국토 개발이 이루어질 수록 맹수와의 충돌은 필연이기에 징병제 초기부터 장병들을 동원하여 해수구제사업이 진행되었다. 실제로 홍범도는 한반도 맹수가 거진 씨가 말라 연해주로 사냥터를 옮겼다고 언급했고 테디 루스벨트와 김옥균의 대화에서 그 실황이 더 자세히 밝혀졌다. 언제 한번 한국에 사냥이나 오라는 김옥균의 말에 루스벨트가 아직 호랑이가 남아있냐고 물었고 김옥균은 [[시베리아호랑이/한반도|호랑이]]는 이미 한반도에서 절멸되어 [[연해주]]에나 가야 있고 한반도에는 [[곰]],[* [[반달가슴곰]]과 [[우수리불곰]]이 모두 포함된 듯 싶다.] [[아무르표범]], [[스라소니]] 정도만 남아있다고 답했다. * '''[[박가분]]''' 원 역사보다 16년 빠른 1900년에 판매되어 조선의 중전인 자영이 사용할 정도로 유행하였는데 녹화회에서 박가분에 들어있는 [[납]] 성분이 인체에 지극히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 '''공문서 양식확립''' 관아에서 쓰는 이런저런 소장 양식이 날이 갈수록 번잡해져 나이 많은 이들은 많은 대로, 젊은이들은 젊은 대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생겨 귀남이 관공서에 예시로 된 양식을 작성하여 구비해두고 이를 참고하라고 하였다. 이때 예로 들기를 사람 이름을 '''[[홍길동]]'''으로 하자 하여 어떤 이들은 성상께서 근래 유행하는 홍길동전을 읽어보시고 그 뜻을 갸륵하게 여기셨다 단정하고, 자유당 선비들은 홍길동전이 북인인 허균의 작품이니까 참된 탕평의 뜻을 펴고자 하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이들은 얼자가 나라 세워 보위에 오르는 이야기이니, 백성을 아끼시는 한결같은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냐며 넘겨짚었다. * '''[[홍길동전]]''' 대학원에서 패관소품 연구하는 이들이 원 역사보다 대략 30년 빨리 홍길동전이 조선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 '''국사공론회''' 총리대신 추거를 앞두고 1902년 쌀 소동에 대한 각 당 후보의 입장을 알리고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최익현이 제안하여 세계 최초의 대선 토론회가 열렸다. 개화당의 홍영식, 자유당의 최익현, 공산당의 전봉준이 맞붙었으며, 사회자는 참의원정 이상재가 맡았다. 장소는 참의원 청사였고 경기 일원까지는 라디오 송출로, 전국 각지로는 전화로 생중계되어 지방의 사람들도 라디오가 있는 관아나 전화가 있는 곳으로 몰려가 토론회를 지켜봤다. 개화당과 공산당은 쌀 소동의 잘잘못이 누구인지 가리는 것을 넘어 각자 정책 비전을 내놓았다. 홍영식은 기계로 인력을 대체하여 고용비를 줄이고 소출을 늘리면서도 기계 공업을 통해 부국을 이룩하자 주장하였고, 전봉준은 농협을 본받아 농민들을 모아 힘을 합치고, 농가 소출을 곧이곧대로 도회지로 넘기기보다 상품 작물을 심고, 남는 쌀로 술이나 떡을 빚어 가치를 높이자 주장하였다. 최익현은 자기 뜻을 발의하기보다 그 사이에서 주로 양당을 논박하였다. 사실상 최익현 한 사람이 논의를 이어가며 나머지 두 후보와 번갈아 문답하는 형세가 되었다. * '''[[라듐]] 발견'''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퀴리 부인이 연구를 지원해준 조선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원 역사의 명칭 '라듐'이 아니라 '조소늄(Josonium)'이라 명명했다. * '''[[일진회]]''' 원 역사에서 친일 포퓰리즘 단체였던 일진회가 차기 총리를 꿈꾸는 이완용이 창설한 반식민주의 단체가 되었다. 이완용이 딱 저 같은 인간들을 모아 창설한 단체라서 라인업이 아주 화려하다. 원 역사 [[을사오적]]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과 [[정미칠적]] [[송병준]]이 회원이다. * '''[[국제정치학|종횡학]] 창시''' 원 역사의 국제정치학으로, 최익현에 의해 화서학원에 원 역사보다 약 10년 먼저 학과가 개설되었다. 정강사의 안행론에 대응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름은 옛 제자백가 시절의 [[종횡가]]에서 따왔으나, 종과 횡의 가운데 '중(中)'이 있듯 나라 사이, 도리와 이익 사이에서 균형의 길을 찾겠다는 뜻이 있다. 대전쟁 이후 미국이 자신들이 내건 과격한 금융지원 제안이 유럽의 경계를 사서 난처해지자 종횡학 연구 자문 인력을 급히 확충하여 종전 회의에 나섰다. * '''[[소양강댐]], [[충주댐]] 준공''' 제2차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따라 시작된 사업이다. 후버가 댐 건설 방책을 기무회의에서 조리있게 설명하자 귀남이 댐 이름을 [[후버 댐|후보제]]로 하면 좋겠다 했지만, 그런 전례가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로 후버에게 [[소양강|소양]]이라는 아호를 내려 연만 닿게끔 하였다. 1913년 기준으로 이미 완공되어 북한강과 남한강의 치수가 이뤄졌고 한강의 범람도 잦아들었다. * '''[[옥음방송|옥음]][[조지 6세|방송]](玉音放送)''' 조선이 착실히 발전하면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은 1910년의 평범한 어느 날로 끝났지만 동시기 유럽에서 보불전쟁을 뛰어넘는 [[제1차 세계 대전|대전쟁]]이 터지자[* 원 역사에서는 1914~1918년에 1차대전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대응할지 골치를 앓았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해 위아래로 혼란스럽던 와중, 유럽을 돕고자 결심한 귀남이 몸소 방송으로 백성들에게 호소하기로 결정, 단군 이래 최초로 국가원수가 라디오 생방송으로 목소리를 내는 역사적 순간이 오게 된다.[* 전생의 자신이 [[6.25 전쟁]] 때 UN군의 도움을 받았고 전후 재건에서도 타국의 지원을 받은 경험이 있어 그 시절이 생각나 여유가 생겼으니 한 번쯤 그때의 그들처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11년, 전국 2천만 백성들이 귀를 기울인 가운데[* 작중 서술을 빌리자면, '''팔도가 멈추었다.'''] 연설 첫 마디부터 '''"이보게, 이것 켜져 있는 거 맞는가?"'''라며 엉뚱한 NG를 낸 귀남이 이렇게 된 거 그냥 솔직하게 할 말 털어놓기로 결심하고 유럽을 돕자는 마음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한다. 할 말 다 털어놓은 귀남이었지만 뭔가 반응이 아니다 싶었는지 '''"만일 가기 싫다면 내가 직접 가서 도울 것이며 정 안된다면 임금 자리 내놓고라도 갈 것이니 그렇게 알라."'''라며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는 마무리로 연설을 끝맺는다.[* 귀남은 전생 합해 백 년은 되었을 경험에도 전장이라면 학을 떼었으므로 진짜로 갈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스튜디오에 있던 안양대군과 관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것은 물론, 연설에 귀 기울이던 만백성들은 위 아래를 가리지 않고 기겁하였고 '''온 팔도가 뒤집어졌다.''' '도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갈라진 여론은 '어떻게 해야 구주에 가서 도울 수 있을까'로 뒤바뀌었고 노인들은 곳간 열쇠 쥔 며느리들에게 사람이라면 도와야 한다고 눈물을 흘렸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참여하려는 아우성이 벌어졌고 조선의 옥음방송에 귀 기울이던 대청과 일본도 연설문 내용이 전해지자 '''마지막에 나온 공갈협박은 생략한''' 내용의 국문을 돌리고 협력을 제안하는 등, 소소한 해프닝 끝에 1912년 초, 최익현을 수장으로 한 창의단이 유럽으로 향한다. * '''[[맨해튼 계획|밤섬 계획]]''' 격치물성청 본청 근처이면서 출입 인원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밤섬]]에 격치물성청 부속 연구소를 지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핵 사용과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아직은 귀남의 기억 속에만 있는 [[원자폭탄]]의 개발 가능성을 세계 각국과 함께 미리 연구하였다. 서던 툴레 제도에서 첫 원자폭탄 '비원(悲願)'[* 그것을 원해야 한다는 것이 슬퍼서 비원이며 누군가가 먼저 만들기 전에 국제협력으로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각오 비장해서 비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온갖 대체역사소설과 실제의 핵실험에서 '국가의 운명을 건' 각종 적극적이고 선전적인 이름이 붙은 것과는 맥을 달리한다.]의 핵실험이 성공하고 [[유엔군사령부|만국연합군]]의 관리 하에 넘어가면서 대황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하던 국제 정세를 안정시켰다. 정확한 시기는 나오지 않으나 정황상 1930년대 초반에 완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본작에서 2차대전과 냉전이 일어나지 않은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나머지는 EU가 1910년대 후반에 창설된 것과 히틀러가 평화의 사도로 전향(...)한 것이 원인이다.] 귀남이 산신령과 함께 미래에서 박물관에 기록된 바를 들으니 실제 역사와 달리 오펜하이머 외에 한국의 이원철 박사[* 국내 이학박사 1호인 우남 [[이원철]] 박사(1896~1963)일 것이다. 원 역사에서는 한국 천문학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 기상관측업무 및 항공기 운항업무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지만 일제에 쫓겨나기 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 및 학과장이었으므로 본 세계관에서는 원자력 공학에 참여할 가능성도 크다.], 인도의 [[사티엔드라 나트 보스]] 교수 등이 참여하였고, 특별히 초청된 마리 퀴리가 기폭 스위치를 눌렀다. 실험 성공 후 오펜하이머가 실제 역사처럼 "나는 죽음,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노라..."하고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읊자 인도인인 보스 교수가 '그 구절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순환을 의미한다'고 알려주었다고 전해진다.[* 오펜하이머가 읊은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시간, 뭇 세계를 허무는 자'로 만물의 순환을 의미하는 힌두교 철학을 설명하는 대사였다. 즉, 오펜하이머가 읊은 구절은 오역이다.] 원 역사와 달리 인도인 박사가 '단순한 파괴를 넘어선 순환'을 설명해주는 대사는 본작의 핵무기가 원 역사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때 이원철 박사는 고종의 '역천'을 거론하며 능히 하늘(사람)의 이치도 바꿀 수 있을 것이며, 나트 박사도 이에 동의하며 '특정 국가가 먼저 개발해 타국에게 '절대적 무기' 앞에 굴복할 것을 강요했다면 세계가 어떻게 되었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본작의 핵무기는 UN 직속에 속해 있으며 특정 국가가 소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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